백 명의 무당이 살던 계곡, 그 금지된 사랑의 시작
백무동 — 백 명의 무당이 살던 계곡, 그 금지된 사랑의 시작 겨울 지리산은 말이 없다. 눈도 없고, 바람도 잠든 날이었다. 나는 혼자 백무동 계곡 입구에 서 있었다. 함양 마천면, 지리산 북쪽 자락 깊숙이 숨어있는 이 계곡은 한여름에도 한기가 돈다는 곳이다. 겨울에는 오죽하랴. 계곡물 소리만이 낮고 묵직하게 바위 사이를 흘렀다. 얼어붙을 듯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안내판 앞에 멈춰 섰다. 백무동(百巫洞). 백 명의 무당이 살던 골짜기. 그 글자들을 읽는 순간, 나는 이상한 떨림을 느꼈다.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다. 이 계곡의 이름 속에는 오래전 사람들의 숨결이, 기도가,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사랑 하나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마고할매와 칠상사 주지스님 태초에 지리산은 마고할매의 것이었다. 천왕봉 꼭대기에 앉아 구름을 빚고, 골짜기마다 물줄기를 내리고, 바위 틈에 꽃씨를 심던 여신. 그녀의 손이 닿은 곳마다 생명이 피어났고, 그녀의 눈길이 머문 곳마다 신령한 기운이 서렸다. 지리산은 그녀의 몸이었고, 지리산의 바람은 그녀의 숨결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칠상사(七祥寺) 주지스님이 이 산에 들어왔다. 깊은 산중 절간에서 불경을 읽고 참선을 하던 스님은 산을 오를 때마다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산길을 걷노라면 어디선가 눈길이 느껴졌다. 계곡물 소리에 섞여 낮은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했다. 바람이 불면 꽃잎이 스님의 법의 자락에 내려앉았다. 스님은 처음엔 마음을 다잡았다. 산이 깊으면 환청도 생기는 법이라고.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그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이른 봄날 새벽이었다. 스님이 계곡가 바위에 앉아 물소리를 듣고 있을 때, 안개 속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백발이 구름처럼 흘러내리고, 눈빛은 별처럼 깊고, 걸음걸이는 바람처럼 소리가 없었다. 스님은 그녀가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그 순간, 깨달음을 향해 곧게 세워뒀던 마음 한 켠이 조용히 무너졌다. 마고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