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제18화 제의 (祭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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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화 — 제의 (祭儀) 짙은 흙먼지와 비릿한 물내가 가라앉은 마당은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처참한 몰골이었다. 방금 전 명화의 타버린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맹렬한 검은 기운은, 낫과 몽둥이를 들고 살기를 띠며 날뛰던 어른들을 단숨에 흙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부러진 팔다리를 부여잡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만이 고요한 새벽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명화는 사시나무 떨듯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화상 흉터 주위로 도드라진 시커먼 핏줄에서는 여전히 지옥의 아지랑이 같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던 이 끔찍한 어둠의 정체가 무엇인지 명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신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차가운 뱀처럼 감겨왔다. [ 어둠을 삼킨 자여, 결국 네가 저들을 해치는 가장 끔찍한 괴물이 되었구나. ] "아니야... 난 그냥 준이를 지키려고..." 명화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순간, 마당 한구석에서 폐에 고인 피를 토해내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옥분이었다. "할머니!" 명화는 무릎이 긁히는 것도 잊은 채 흙바닥을 기어 옥분에게 달려갔다. 죽은 자를 저승으로 배웅하던 옥분의 하얀 소복은 이미 검붉은 피로 처참하게 젖어 있었다. 하룻밤 새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은 진흙과 피에 엉겨 붙었고, 이승과 저승의 문을 강제로 닫으며 자신의 명줄을 깎아낸 노무당의 육체는 한계를 넘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명화의 오열이 안개 낀 새벽 마당을 메웠지만, 통곡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어른들의 무자비한 구둣발에 짓밟혀 만신창이가 된 준이가 흙바닥을 기어 명화 곁으로 다가왔다. 터진 입술과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렀지만, 소년의 눈동자만은 그 어느 때보다 기이할 정도로 맑고 단호했다. 준이가 다가올수록 명화의 시야에는 두 사람을 옭아맨 기괴한 환영이 뚜렷해졌다. 준의 발목에서부터 명화의 시커똔 손바닥까지 이어져 있...

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17화병 (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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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화 — 병 (病) 쾅! 쾅! 콰아앙! 신당의 낡은 나무 대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대문 밖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거친 고함과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아수라장처럼 뒤엉켜 있었다. 횃불이 뿜어내는 매캐한 연기와 성난 인간들의 땀 냄새가 찢어진 창호지 틈을 타고 신당 안으로 역겹게 밀려 들어왔다. 저승의 수살귀들을 간신히 밀어내고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이번에는 이승의 살아있는 광기가 두 아이의 목통을 조이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당장 문 열어, 이 무당 할망구야! 그 서울 애새끼가 우리 애들을 물귀신한테 제물로 바친 거 다 안다! 당장 끌어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이성을 마비시켰고, 두려움에 먹혀버린 마을 사람들의 집단 광기는 오직 분노를 쏟아낼 희생양만을 찾고 있었다. 낫과 쇠스랑, 굵은 몽둥이를 든 십여 명의 장정들이 기어이 빗장을 부수고 마당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살기가 번뜩이는 그들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라, 광기라는 이름의 '병(病)'에 깊이 감염된 악귀의 눈빛과 다를 바 없었다. "이 무지몽매한 것들아! 감히 뉘 앞이라고 쇳덩이를 함부로 휘두르느냐!" 마당으로 뛰쳐나간 것은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할머니 옥분이었다. 옥분은 찢어진 소복 차림 그대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몸을 이끌고 성난 군중 앞을 가로막았다. 마을 사람들은 옥분의 기괴하게 늙어버린 모습에 일순간 주춤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슬 퍼렇던 노무당이 마치 송장처럼 바싹 마른 채 백발을 흩날리고 서 있는 모습은 묘한 공포감을 주었다. 하지만 광기는 얕은 두려움 따위는 쉽게 씹어 삼켰다. 아이를 잃어버린 식육점 남자가 눈을 핏발처럼 붉히며 낫을 치켜들었다. "비켜! 당신이 저 재앙 덩어리를 감싸고도니까 마을에 수마가 덮친 거 아니야! 저 애새끼를 강물에 던져버려야 잃어버린 우리 애들이 돌아온단 말이다!" 남자가 옥분의...

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16화 대가(代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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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화 대가(代價)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지독하게 메마른 갈증과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이었다. 식도가 거친 모래로 긁혀나간 것처럼 따가웠고, 혀는 퉁퉁 부어 입천장에 들러붙어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우며 폭발했던 은방울의 찬란한 푸른빛도, 얇은 창호지를 갈기갈기 찢고 들어오며 명화의 숨통을 조이려던 수살귀들의 끔찍한 비명도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진 뒤였다. 명화는 천장이 느리게 빙빙 도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손목이 후들거렸다.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누군가 빌려 입힌 헐렁한 옷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찢어진 문풍지 틈새로 눈을 찌를 듯이 날카로운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빛이 비춘 신당 안은 폭격을 맞은 듯 처참했다.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노란 괴황지 부적들은 모두 시커멓게 타들어 가 재가 되어 마룻바닥에 흩뿌려져 있었고, 제단 위의 놋그릇들은 짓이겨진 듯 찌그러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어떤 것은 마치 거대한 짐승의 이빨에 짓눌린 것처럼 모양 자체를 잃어버렸다. 그것은 결코 하룻밤 사이의 단순한 싸움이 남긴 흔적이 아니었다. 한 세상이 무너졌다 다시 세워진 자리였다. "이제야 정신이 드느냐." 갈라진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르고 거친 목소리. 명화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 옥분이 제단 옆 기둥에 간신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꼿꼿하고 서슬 퍼렇던 할머니의 검은 머리칼은 서리가 내린 듯 새하얗게 세어 있었고, 주름진 얼굴 위로는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사선으로 깊게 패어 있었다. 마치 하룻밤 사이에 십 년, 아니 이십 년의 세월을 강제로 뒤집어쓴 듯한 끔찍한 노화였다. 핏기 없는 입술 가장자리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굳어 있었다. "할머니… 머리가… 얼굴이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예요?" 명화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옥분은 입을 열기까지 한참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