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제8화 '안개 속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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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안개 속의 진실 신당 문을 열고 나선 명화의 발등 위로 차가운 새벽 안개가 뱀의 혀처럼 눅눅하게 휘감겨 올라왔다. 굿판의 뜨거웠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이었으나, 마당의 공기는 이미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명화의 얇은 셔츠를 뚫고 뼛속까지 시린 냉기를 몰고 왔다. 명화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자욱한 안개는 마치 세상과 이 집을 단절시킨 거대한 장막 같았고, 그 장막을 뚫고 익숙한 실루엣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명화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소년, 이준이었다. 준은 평소처럼 단정한 차림이었으나, 명화의 눈에는 소년 주변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일렁이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끓는 물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준의 형체는 안개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흩어져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명화는 그 모습이 꼭 현실의 존재가 아닌, 누군가 안개를 뭉쳐 급하게 빚어놓은 가짜처럼 느껴져 몸서리쳤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안에서... 아주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 비명 같기도 하고, 누가 우는 것 같기도 하고... 걱정돼서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더라고.” 준이 한 걸음 다가오며 물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명화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굿판의 정적을 깨고 들려왔던 그 따뜻한 환청이 다시 머릿속을 날카롭게 긁는 것 같았다. 분명 이준의 목소리였지만, 지금 명화의 손바닥에 새겨진 은색 방울은 살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과 함께 격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경고였다. 저 다정한 목소리와 슬픈 눈망울 뒤에 숨겨진 거대하고 축축한 무언가에 결코 속지 말라는, 신의 서늘하고도 잔혹한 경고였다. 명화의 시선이 준의 발치 너머로 향했다. 새벽의 희미한 빛 아래, 소년의 그림자가 기괴한 형태로 늘어져 있었다. 하나여야 할 그림자가 마치 여러 개의 관절이 꺾인 팔들처럼 기괴하게 갈라지더니, 마당의 차가운 흙바닥을 기어 명화의 발끝을 향해 서서히 뻗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빛의 굴절이 아니었다. 살아서 ...

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7화 신당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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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화  신당 앞에서 굿판이 끝난 신당 안은 지독하게 고요했다. 방금까지 천장을 뒤흔들던 놋방울 소리와 할머니의 거친 무가는 간데없고, 오직 타들어 간 향의 잔해만이 눈처럼 하얗게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명화는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손바닥 중앙, 은색 방울이 살을 파고든 자리는 마치 뜨거운 인두로 지진 듯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 육체적인 통증보다 명화를 더 괴롭히는 것은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환청이었다. '명화야, 나 좀 봐줘. 나 여기 있어.' 그것은 분명 이준의 목소리였다. 서울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명화에게 말을 걸어주었던 소년. 하지만 동시에 그 목소리는 썩은 민물의 비린내를 머금은, 죽은 자의 축축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명화는 혼란스러웠다. 신이 들려준 그 목소리는 구원일까, 아니면 자신을 물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악귀의 유혹일까. 명화는 자신의 손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명화야, 이리 와 보거라." 할머니 옥분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명화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옥분은 탈진한 듯 제단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평소 호랑이처럼 매섭던 할머니의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작고 초라해 보였다. 옥분은 떨리는 손을 뻗어 명화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손가락 마디마디에서는 진한 향 냄새가 배어 있었다. "마지막 방울 소리가 울릴 때... 무엇을 들었느냐. 혹시 누군가 너를 부르지는 않더냐? 내 말이 들리거든 절대 대답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대답... 하지는 않았겠지?" 할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평생 신을 모시며 강인하게 살아온 노무당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다름 아닌 '공포'였다. 명화는 입술을 짓씹었다. 만약 그 목소리가 준의 것이었다고 사실대로 말한다면, 할머니는 분명 그 소년을 마을에서 내쫓으려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무서운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명화는 할머니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며 고개...

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6화 첫 번째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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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화 첫 번째 굿  마을의 공기는 더 이상 수군거림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축축하게 젖은 솜처럼 마을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고, 사람들의 눈빛에는 날 선 경계심이 서렸다. 사달이 난 것은 미장원 아주머니 미숙이 강가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발견될 당시, 품에 낡은 아이용 한복 저고리 하나를 필사적으로 껴안고 있었다고 속삭였다. 그 저고리는 명화가 할머니의 신당에서 보았던, 사진 속 정순이가 입고 있던 것과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 집 손녀년이 기어이 사달을 냈어." "애가 물가에 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 아주머니가 그렇게 돼?"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들을 들으며, 명화는 마당 감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바닥 중앙, 보이지 않는 은색 방울이 닿은 자리가 화끈거렸다. 차가운 금속이 살을 파고드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귓속에서는 낮고 높은 두 개의 방울 소리가 불협화음을 내며 울려 퍼졌다. 할머니 옥분은 마침내 결심한 듯 신당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평소 명화의 접근조차 불허하던 그 금기된 공간이었다. 옥분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깊은 주름이 패어 묘비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명화야, 들어와라." 할머니의 부름에 명화는 홀린 듯 신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방 안은 이미 진한 향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벽을 가득 채운 노란 부적들이 촛불의 일렁임에 따라 마치 살아있는 비늘처럼 꿈틀거렸다. 옥분은 제단 위에 놋그릇을 정돈하며 낮게 읊조렸다. "물기운이 너를 점찍었으니, 이제는 피할 길이 없다. 오늘 인연을 끊어내지 못하면 너는 평생 그 아이의 그림자에 먹혀 살게 될 게야." 할머니는 명화의 손을 잡아 제단 앞에 앉혔다. 그리고 품에서 낡은 놋방울 묶음을 꺼내 명화의 눈앞에서 천천히 흔들었다. 쟁강, 쟁강. 현실의 방울 소리가 명화의 머릿속 환청과 뒤섞이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지금부터 내...

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5화-물가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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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5화-물가의 여자 마을 변두리, 냇가 근처의 공기는 늘 무겁고 정체되어 있었다 .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도 물 위에는 뼈를 깎는 듯한 차가운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고, 그 안개 속에서는 젖은 흙과 썩은 수초가 뒤섞인 냄새가 났다 . 그것은 명화가 미장원 아주머니인 미숙에게서 처음 맡았던 그 '비린내'와 같았다 . 살갗을 파고드는 지독하고 금속적인 죽음의 악취였다 . 무언가에 홀린 듯, 명화는 그날 오후 혼자 물가로 향했다 . "물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무덤이다"라는 할머니 옥분의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지만, 귓속의 환청 같은 방울 소리는 새로운 리듬으로 명화의 등을 떠밀었다 . 진흙투성이 강둑에 다다르자 세상은 진공 상태처럼 고요해졌다 . 키 큰 갈대들을 흔들던 바람도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 명화는 물가에 서서 탁한 소용돌이를 응시했다 . 자꾸만 꿈속에서 보았던 정순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 죽은 자들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찾아 안쪽으로 향해 있던 그 텅 빈 눈동자가 물결 위로 겹쳐 보였다 . 서걱. 마른 갈대를 밟는 둔탁하고 의도적인 발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 명화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 심장이 갇힌 새처럼 흉통을 두드렸다 . 거기 미숙이 서 있었다 . 미장원 아주머니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새집 같았고, 피부는 수년간 햇빛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한 잿빛이었다 . 하지만 명화를 얼어붙게 만든 건 그녀의 눈이었다 . 초점은 없었지만, 그 텅 빈 구멍 안에서는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살아있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어둡고 절망적인 굶주림이었다 . "너..." 미숙이 속삭였다 . 그 목소리는 목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젖은 걸레로 돌바닥을 끄는 것 같은 질척하고 불쾌한 소음이었다 . 명화는 발을 뗄 수 없었다 . 강물의 비릿한 악취가 갑자기 미숙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파도처럼 뿜어져 나와 명화를 덮쳤다 . 미숙이 한 걸음 ...

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4화 정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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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정순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번지기 시작한 해괴한 소문은 복순이네 엄마의 입을 통해 명화의 귀에 닿았다. 복순이네는 명화의 집에서 두 집 건너 살았는데, 그녀의 말투는 마치 비가 새는 지붕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 같았다. 특별한 악의는 없었으나, 결코 멈추는 법이 없었고 무엇보다 비밀을 담아두지 못했다. "그 미장원 미숙이 말이야." 복순이네 엄마가 마을 공동 우물가에서 누군가에게 속삭였다. 명화가 빈 물통을 들고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목소리를 낮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밤마다 자정만 넘기면 물가에 나간대. 우리 남편이 벌써 세 번이나 봤다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장대처럼 꼿꼿이 서서 물만 보고 있더라는 거야." 명화는 발걸음을 늦췄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아무 말도 안 한대요? 기도라도 하는 건가?" 곁에 있던 이웃이 물었다. "말은 무슨. 숨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가만히 서 있대. 마치 물속에서 뭐가, 혹은 누군가가 튀어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야." 명화는 물을 채우지 못한 빈 양동이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양동이의 무게가 오히려 물이 가득 찼을 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마당 한가운데에 양동이를 내려놓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툇마루에는 할머니 옥분이 앉아 콩을 까고 있었다. 할머니는 명화가 온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콩껍질이 갈라지는 건조한 소리만이 마당의 정적을 메웠다. 명화는 할머니 옆에 나란히 앉았다. "할머니. 마을 사람들이 물가에 나가는 아주머니 이야기를 해요." 서걱거리던 손길이 아주 잠깐 멈췄다. 세상이 숨을 죽인 듯한 찰나의 정적 후, 리듬이 다시 이어졌다. "들었다." 할머니가 짧게 답했다. "왜 가는 걸까요?" 할머니는 까던 콩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마당의 감나무 너머를 응시했다. 오후의 햇살은 멍든 오렌지빛으로 변해 있었고, 마당 위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