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16화 대가(代價)

이미지
 16화 대가(代價)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지독하게 메마른 갈증과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이었다. 식도가 거친 모래로 긁혀나간 것처럼 따가웠고, 혀는 퉁퉁 부어 입천장에 들러붙어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우며 폭발했던 은방울의 찬란한 푸른빛도, 얇은 창호지를 갈기갈기 찢고 들어오며 명화의 숨통을 조이려던 수살귀들의 끔찍한 비명도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진 뒤였다. 명화는 천장이 느리게 빙빙 도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손목이 후들거렸다. 마치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누군가 빌려 입힌 헐렁한 옷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찢어진 문풍지 틈새로 눈을 찌를 듯이 날카로운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빛이 비춘 신당 안은 폭격을 맞은 듯 처참했다.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노란 괴황지 부적들은 모두 시커멓게 타들어 가 재가 되어 마룻바닥에 흩뿌려져 있었고, 제단 위의 놋그릇들은 짓이겨진 듯 찌그러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어떤 것은 마치 거대한 짐승의 이빨에 짓눌린 것처럼 모양 자체를 잃어버렸다. 그것은 결코 하룻밤 사이의 단순한 싸움이 남긴 흔적이 아니었다. 한 세상이 무너졌다 다시 세워진 자리였다. "이제야 정신이 드느냐." 갈라진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르고 거친 목소리. 명화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 옥분이 제단 옆 기둥에 간신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꼿꼿하고 서슬 퍼렇던 할머니의 검은 머리칼은 서리가 내린 듯 새하얗게 세어 있었고, 주름진 얼굴 위로는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사선으로 깊게 패어 있었다. 마치 하룻밤 사이에 십 년, 아니 이십 년의 세월을 강제로 뒤집어쓴 듯한 끔찍한 노화였다. 핏기 없는 입술 가장자리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굳어 있었다. "할머니… 머리가… 얼굴이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예요?" 명화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옥분은 입을 열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15화 목소리의 정체

이미지
15화  목소리의 정체 콰창—! 얇은 문창호지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가며, 시커먼 진흙과 썩은 물때가 잔뜩 엉겨 붙은 거대한 손목 하나가 신당 안으로 불쑥 밀고 들어왔다. 그 손은 마치 굶주린 짐승의 주둥이처럼 허공을 미친 듯이 휘저으며 가장 먼저 산 자의 온기를 찾았다. 찢어진 문틈 사이로 훅 끼쳐 들어온 것은 단순한 강물 냄새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년 동안 강바닥에 가라앉아 햇빛 한 번 보지 못한 망자들의 질척거리는 원한, 바로 그 지독한 수마(水魔)의 악취였다. "이 악독한 것들이 기어이 선을 넘는구나!" 할머니 옥분이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깨물며 손에 쥔 시퍼런 무칼을 허공으로 휘둘렀다. 사각! 쇳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이 젖은 손목을 베어내자, 붉은 피 대신 시커먼 흙탕물이 터져 나오며 문풍지를 더럽혔다. 문밖에서는 팔이 잘려 나간 수살귀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밤공기를 찢었다. 하지만 방어는 역부족이었다. 잘려 나간 손목 뒤로 두 개, 세 개의 젖은 손들이 다시 창호지를 뜯어내며 거머리처럼 신당 안으로 기어들어 오기 시작했다. 명화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오른쪽 손바닥 안에서 은색 방울이 징, 징 하며 터질 듯한 파공음을 내고 있었지만, 방울의 푸른빛만으로는 사방에서 조여오는 어둠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다. 그때, 방 한가운데 뻣뻣하게 앉아 있던 준의 입술이 다시 기괴하게 벌어졌다. "문이 열렸네. 춥다, 명화야. 우리 다 같이 따뜻한 물속으로 돌아가자." 새까맣게 물든 준의 눈동자는 허공을 향해 있었지만, 목소리만은 정확히 명화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순이의 앳된 목소리 하나만이 아니었다. 젊은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 늙은 노인의 가래 끓는 목소리, 성인 남자의 굵은 목소리까지. 수십 명의 망자가 좁은 준의 성대를 한꺼번에 비집고 나오느라 소년의 목에 시퍼런 핏대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소년의 육체는 거대한 수마가 이승에 쏟아내는 오물통이나 다름없었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14화 밤의 방문자

이미지
  14화 밤의 방문자 할머니 옥분의 끔찍한 과거와, 명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거대한 수마(水魔)의 저주. 그 무거운 진실이 신당 안의 공기를 납덩이처럼 짓누르고 있었다. 제단 위의 촛불이 산소가 부족한 듯 가늘게 파르르 떨리다 이내 위태롭게 일렁였다. 밤은 이미 가장 깊은 심연의 시간에 도달해 있었다. 평소라면 멀리서 들려와야 할 동네 개들의 짖는 소리조차, 오늘 밤엔 쥐죽은 듯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마을 전체가 거대한 물속으로 가라앉아 완벽한 진공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으으음..." 그 지독한 정적을 깬 것은 돗자리 위에 쓰러져 있던 준이었다. 미세하게 떨리던 소년의 눈꺼풀이 천천히, 아주 기계적인 속도로 밀려 올라갔다. 명화는 숨을 멈추고 준의 얼굴을 살폈다. 준이 의식을 되찾은 것일까. 하지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준의 움직임은 산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동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굵은 실에 매달린 인형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강제로 끌어올려지듯, 상체 전체가 뻣뻣하게 수직으로 일어섰다. "준아... 정신이 들어?" 명화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가려던 찰나, 할머니 옥분이 날카로운 손아귀로 명화의 손목을 낚아채어 자신의 등 뒤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가까이 가지 마라!" 할머니의 경고에 명화는 다시 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깨어난 소년의 눈동자에는 반사되는 촛불의 빛무리가 전혀 없었다. 희자위까지 온통 시커먼 먹물처럼 변해버린 준의 두 눈은, 빛을 반사하는 대신 방 안의 모든 온기를 빨아들이는 끝없는 늪처럼 보였다. 소년은 턱을 기괴한 각도로 치켜든 채, 초점 없는 텅 빈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찰박. 찰박. 그때였다. 굳게 닫힌 신당의 문밖, 마당 쪽에서 기분 나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가 내린 적도 없는데, 누군가 발목까지 차오른 진흙탕을 맨발로 질척거리며 걷는 소리였다. 명화의 솜털이 곤두섰다. 발소리는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