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2화 미장원 아주머니

이미지
 2화 미장원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다시 나타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공기는 밤새 내린 이슬을 머금어 눅눅했다. 명화는 마루에 걸터앉아 미적지근한 밥을 뜨다 말고 대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대문 틈 사이로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그녀는 문을 두드리지도, 소리를 내어 누구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망부석처럼, 혹은 그 자리에 원래 박혀 있던 기둥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먼저 알아챘다. 옥분은 숟가락을 내려놓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화야, 안으로 들어가 있어라." 할머니의 목소리는 낮고 깔깔했다. 명화는 젓가락을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왜요? 아주머니가 왜 저러고 서 있어요?" "말 길게 하게 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 명화는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대청마루 구석의 굵은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나무의 거친 결이 뺨에 닿았지만 차가운 기운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했다. 할머니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규칙적이지만 서두르지 않는, 그러나 어딘가 단호한 발걸음이었다. "아주머니." 할머니가 대문 앞에서 멈춰 서서 불렀다. 아주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화는 기둥 뒤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아주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어젯밤 남편을 잃고 오열하던 그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얼굴은 매끈했다. 눈이 붓지도, 충혈되지도 않았다. 아니, 그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슬픔도, 분노도, 고통도 지워진 채 텅 비어버린 눈동자만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초점 없는 눈이었다. "우리 명화한테 볼일 없으니 그만 가보세요." 할머니의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딱 그 새벽 안개의 온도였다. 아주머니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

신의 목소리를 듣는 아이 제1화 방울소리

이미지
  1화 — 방울 소리 명화가 처음 냄새를 맡은 건 여덟 살 여름이었다. 미장원 아주머니가 할머니 머리를 다듬으러 왔던 날. 아주머니는 파마 약 냄새를 풍기며 좁은 마루에 앉았고, 명화는 그 옆에서 수박씨를 뱉고 있었다. 딱히 이상할 것 없는 오후였다. 그런데 냄새가 났다. 비린내였다. 생선 비늘 같기도 하고, 오래된 물 같기도 한. 근처 개울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아니었다. 명화는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수박도 멀쩡했고, 마루도 깨끗했다. 냄새는 아주머니한테서 났다. "왜 그래, 명화야." 할머니 옥분이 가위질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명화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아주머니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나요 라고 말하면 혼날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명화는 수박씨를 하나 더 뱉었다. 아주머니가 돌아간 뒤, 명화는 마당 한쪽에 쪼그려 앉아 개미를 들여다봤다. 개미들은 죽은 나방을 끌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나방은 이미 형체가 반쯤 무너져 있었는데도 개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명화야." 할머니가 불렀다. "물가에 가지 마라. 오늘은." 명화는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는 명화를 보지 않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가 평소랑 달랐다. 낮고, 아무 감정이 없었다. "왜요?" "그냥." 할머니는 더 말하지 않았다. 명화는 개미를 다시 봤다. 나방의 날개 하나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날개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간이었다. 할머니는 이미 불을 끄고 누워 있었고, 명화는 천장을 보며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비린내. 죽을 사람한테서 나는 냄새라는 걸 명화는 그때는 몰랐다. 쿵쿵쿵. 할머니가 벌떡 일어났다. 명화가 따라 일어나려 하자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있어." 짧은 말이...

백 명의 무당이 살던 계곡, 그 금지된 사랑의 시작

이미지
  백무동 — 백 명의 무당이 살던 계곡, 그 금지된 사랑의 시작   겨울 지리산은 말이 없다. 눈도 없고, 바람도 잠든 날이었다. 나는 혼자 백무동 계곡 입구에 서 있었다. 함양 마천면, 지리산 북쪽 자락 깊숙이 숨어있는 이 계곡은 한여름에도 한기가 돈다는 곳이다. 겨울에는 오죽하랴. 계곡물 소리만이 낮고 묵직하게 바위 사이를 흘렀다. 얼어붙을 듯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안내판 앞에 멈춰 섰다. 백무동(百巫洞). 백 명의 무당이 살던 골짜기. 그 글자들을 읽는 순간, 나는 이상한 떨림을 느꼈다.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다. 이 계곡의 이름 속에는 오래전 사람들의 숨결이, 기도가,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사랑 하나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마고할매와 칠상사 주지스님 태초에 지리산은 마고할매의 것이었다. 천왕봉 꼭대기에 앉아 구름을 빚고, 골짜기마다 물줄기를 내리고, 바위 틈에 꽃씨를 심던 여신. 그녀의 손이 닿은 곳마다 생명이 피어났고, 그녀의 눈길이 머문 곳마다 신령한 기운이 서렸다. 지리산은 그녀의 몸이었고, 지리산의 바람은 그녀의 숨결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칠상사(七祥寺) 주지스님이 이 산에 들어왔다. 깊은 산중 절간에서 불경을 읽고 참선을 하던 스님은 산을 오를 때마다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산길을 걷노라면 어디선가 눈길이 느껴졌다. 계곡물 소리에 섞여 낮은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했다. 바람이 불면 꽃잎이 스님의 법의 자락에 내려앉았다. 스님은 처음엔 마음을 다잡았다. 산이 깊으면 환청도 생기는 법이라고.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그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이른 봄날 새벽이었다. 스님이 계곡가 바위에 앉아 물소리를 듣고 있을 때, 안개 속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백발이 구름처럼 흘러내리고, 눈빛은 별처럼 깊고, 걸음걸이는 바람처럼 소리가 없었다. 스님은 그녀가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그 순간, 깨달음을 향해 곧게 세워뒀던 마음 한 켠이 조용히 무너졌다. 마고할...

지리산의 봄을 몰고 오는 바람의 신, 영동할매 이야기를 아시나요?

이미지
  지리산의 봄을 몰고 오는 바람의 신, 영동할매 이야기를 아시나요? Do You Know Yeongdong Halmae, the Wind Goddess Who Brings Spring to Jirisan? 음력 2월 초하루 새벽, 나는 지리산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를 들었다. 창문 너머로 능선이 희뿌옇게 밝아오는 시각, 바람이 왔다. 문틈을 비집고, 처마 끝을 긁고, 마른 메밀대를 후려치며 오는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보통 바람이 아니었다. 살아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혹은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것을 마침내 찾아온 것처럼, 온 산자락을 훑고 내 마당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는 알았다. 영동할매가 오셨구나. 할매는 하늘에서 내려오신다 하늘 높은 곳, 구름 위 어딘가에 할매의 집이 있다. 봄이 오기 전, 아직 대지가 차갑게 굳어있는 그 시절에 할매는 긴 여정을 준비하신다. 인간 세상의 농사가 어떤지, 어부들의 바다가 어떤지, 산자락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겨울을 났는지 당신의 눈으로 직접 살피러 오시는 것이다. 음력 2월 초하루, 할매는 하늘 문을 여시고 지상으로 내려오신다. 그리고 보름이 되면 다시 하늘로 돌아가신다. 이 보름간의 시간을 우리는 '영동달'이라 불렀다. 할매가 내려오실 때, 나는 늘 궁금했다. 오늘은 누구와 함께 오셨을까. 🌬️ 딸과 함께 오신 날이면, 딸의 치맛바람이 하늘을 가른다. 매섭고 청명하게. 온 산이 쨍하게 울린다. 할매는 딸이 좋아 연신 웃으시고, 그 웃음소리가 바람이 되어 능선을 타고 내려온다. 🌧️ 며느리와 함께 오신 날이면, 하늘이 흐려진다. 할매는 며느리의 치마를 적셔버리려고 슬며시 비를 뿌리신다. 미워서 그러신다지만, 그 비가 대지를 적시고 씨앗을 깨운다. 할매의 심술이 풍년을 만드는 것이다. 신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며느리보다 딸이 예쁜 마음, 그것만큼은 하늘 위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정화수 한 그릇의 무게 할매가 머무시는 동안, 지리산 자락 마을 어귀마다 정화수 한 ...

달빛의 평화

이미지
  달빛의 평화 🐰 토끼봉의 고요한 밤 지리산 토끼봉 정상, 막내딸 달빛이 은백색 드레스를 입고 달빛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의 곁에는 늘 함께하는 단짝, 하얀 토끼가 있었죠. 부드러운 달빛이 온 세상을 평화로운 광채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참 고요한 밤이야.” 그녀는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속삭였습니다. 달빛의 역할은 달과 소통하며 세상에 평온한 잠과 아름다운 꿈을 선물하는 것이었습니다. “달빛아, 느껴져? 오늘 밤은 뭔가 분위기가 달라.” 토끼가 물었습니다. “나도 느껴져...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그때 저 멀리 아래쪽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잠 못 드는 아이들 달빛은 울음소리를 따라 산기슭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많은 집에서 아이들의 흐느낌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아이가 오늘 밤 울고 있는 거지?” 집집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엄마, 또 무서운 꿈을 꿨어요!” “괜찮아, 민수야. 엄마 여기 있단다.” 또 다른 아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검은 그림자가 나를 쫓아왔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 악몽의 그림자 달빛은 아이들의 꿈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곳엔 모두 똑같은 공포가 있었습니다. 검은 그림자가 아이들을 뒤쫓으며 위협적인 말을 속삭이고 있었죠. “이건 자연스러운 게 아니야... 누군가 의도적으로 악몽을 만들고 있어.” 마을 위로 어두운 에너지가 소용돌이쳤습니다. 그 속에서 작고 사악한 존재, '악몽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키히히... 공포는 정말 맛있는 먹잇감이야!” 요정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아이들이 더 많이 무서워할수록, 나는 더 강해진다고!” “아이들을 괴롭히지 마!” 달빛이 외쳤습니다. “이건 내 본능이야. 난 공포를 먹고 산다고!” 🌙 달빛의 광채 달빛은 두 손에 달빛을 모았습니다. 은빛 광채가 요정을 에워쌌습니다. “아이들에게 평화로운 꿈을 돌려줘!” “아악! 이 빛 좀 치워! 저리 가!” 요정은 으르렁거리며 내기를 제안했습...

🌲 삼신봉의 평화로운 아침

이미지
  🌲 삼신봉의 평화로운 아침 지리산 삼신봉 정상, 여덟째 딸 산이가 짙은 갈색과 숲의 녹색이 어우러진 옷을 입고 거대한 바위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의 주변에는 산의 생명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다람쥐들은 그녀의 어깨 위로 뛰어오르고, 새들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에 둥지를 틀었으며, 사슴들은 그녀의 발치에서 평온하게 쉬고 있었습니다. “모두 오늘 건강해 보이네.” 산이가 따뜻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지리산의 모든 동식물이 살아가는 터전을 지키는 것은 그녀의 가장 소중한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산 아래에서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무슨... 소리지?” 즉시 일어선 산이가 산비탈을 살폈습니다. 산 중턱에서 거대한 굴착기들이 나무들을 쓰러뜨리고 있었습니다. 소음에 놀란 동물들이 그녀에게 달려왔습니다. “찍찍! (산이야, 무서워요!)” 다람쥐들이 울부짖었습니다. “우리 집이 파괴되고 있어요!” 새들이 지저귀었습니다. 산이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 무분별한 개발 소리의 근원지로 달려간 산이는 가슴 아픈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수백 년 된 나무들이 뽑혀 나가고, 동물들의 보금자리는 산산조각 났으며, 숲 바닥은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멈춰요! 당장 멈추세요!” 현장 소장은 인부들에게 소리치며 지시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더 빨리! 환경 조사관들이 오기 전에 다 밀어버려!” 근처 표지판에는 **‘대한 리조트 개발’**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호화 리조트를 짓기 위해 숲을 밀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장 인부로 변장한 산이가 다가갔습니다. “허가를 받고 하는 일인가요?” “허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중에 처리하면 돼.” 소장이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동물들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있잖아요.” “동물? 리조트가 벌어들일 돈에 비하면 그게 무슨 대수라고!” 🦌 집을 잃은 생명들 바로 그때, 어미 사슴이 새끼 사슴을 데리고 숲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엄마, 우리 집은 왜 없어졌어요?” 새끼 사슴이 물었습니다. “나도 모르겠구나...